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제리 전쟁 (문단 편집) === 학살 === 초기에 나름 정석적인(?) 진압을 시도하던 프랑스군은 FLN의 게릴라전에 빡친 나머지 방향을 전환하여 FLN과 똑같이(혹은 그 이상으로) 암살, 테러, (전보다 더한) 학살로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프랑스군이 똑같은 전법으로 나서자 FLN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파일:attachment/image6.jpg]] 프랑스는 독립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학살]]을 벌였다. 파리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던 알제리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1961년 파리 학살]]을 벌였다. 참고로 이 학살을 주도했던 [[모리스 파퐁]] 파리 경찰서장은 학살 이후에도 처벌은 커녕 오히려 승승장구했으나 1981년에 들어서 [[비시 프랑스]]에 협조하며 [[유대인]] 1,600명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한 것을 주도한 것이 발각되어 몰락했다. 1961년의 이 파리 학살을 기점으로 프랑스는 알제리 내에서 민간인들 거주지를 폭격하고 각종 [[전쟁범죄]]를 일으키는 등 막장 행보를 일삼았다. 물론 학살은 당장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1958년경에는 확실히 반란이 진압되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으로는 이런 무자비한 군사 작전을 지속하면서 들어가는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잔혹 행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시대가 된 데다 전쟁에 지친 프랑스군이 내부 붕괴를 일으키면서 허사로 돌아가게 된다. 알제리의 FLN은 1962년에 오랑 학살(1962 مذبحة وهران عام, Le massacre d'Oran ou massacre du 5 juillet 1962)을 저질렀다. 1962년 7월 5일부터 7일까지 [[오랑]]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으로 사망자 대다수가 [[피에 누아르]], 즉 알제리에서 태어난 백인들이다. 사망자는 400~1,500명 정도로 각 주장이 다르다. 이 오랑 학살에 대해서 알제리는 지금도 사과는커녕 인정도 하지 않고 있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출신 중에는 자신이 태어난 알제리를 조국으로 인식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경우에는 배신자, 반역자, 매국노라는 명목으로 학살을 저질렀다. 오랑 학살도 무고한 피해자들이 많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알제리에서는 "피에 누아르들이 무고해? 이것들 사병들을 조직해 알제리에서 등쳐먹던 것들이?"라면서 "오랑 폭동은 그저 일부 프랑스계 폭동에 불과하다. 알제리인들의 피에 누아르 추방에 대하여 폭동 일으킨 것을 진압한 것이라는 프랑스가 자주 하던 소리와 같다. 왜 프랑스인이 당하면 학살이고 알제리인이 당하면 폭동 진압이냐?"고 맞서고 있다. 당시 이런 학살이 이뤄질 때 알제리에 남은 프랑스군 1만 8천여 명은 구경만 했다. 오랑에서 남은 4만여 명의 피에 누아르들을 알제리 해방전선이 공격할 때 몇몇 피에 누아르들은 오랑에서 달아나 [[프랑스군]]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빌었으나 프랑스군들이 외면하고 그냥 가 버렸다는 피에 누아르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다. 심지어 도움을 요청하다가 묵살당한 피에 누아르가 흥분하여 덤벼들자 프랑스군이 개머리판으로 구타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드골 정부가 프랑스군에 어떤 전투적 행동도 하지 말고 그냥 대기하며 알제리 측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학살이 1년 전 [[1961년 파리 학살]]에 대한 알제리의 보복이라는 이들도 많다. 1962년 8월 샤를 드골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1963년에 총살된 프랑스군 [[중령]] 장 바스티앵 티리는 오랑 학살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학살 피해자로서 알제리를 공격해야 한다고 법정에서 외쳤다. 그 때문에 티리 중령을 불명예 퇴역시키고 [[총살형]]에 처한 드골 정부는 오랑 학살을 방치한 프랑스군과 그 책임 등을 따지자면 프랑스 내부에서도 좋을 게 없기 때문에 티리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프랑스 극우를 중심으로 오랑 학살을 따져들고 있긴 하지만 그런 문제를 지적하면 프랑스군의 학살도 다시 부각되어야 하기에 프랑스는 여전히 깊이 따지지 못하고 있다. 구글에 algeria france war로 검색하면 프랑스군에 의해 벌어진 각종 전쟁범죄들을 담은 충격적인 사진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알제리 여성을 성폭행하고 웃는 프랑스 군인들의 충격적인 모습이나 프랑스 군인이 알제리 사람을 참수하고 기념으로 촬영한 웃고 있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사진 등. [[https://casepaga.blogs.sapo.pt/historia-1962-argelia-proclama-4644335|시청 주의]] 한편 FLN은 전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프랑스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프랑스와 알제리의 공존을 주장하는 온건파 아랍인이나 아랍인 공무원, 알제리에 우호적인 온건파 유럽인에 대한 공격을 우선했다. [[적대적 공생|그래야만 중도파가 사라지고 양극단 세력만 남아 대결 국면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FLN은 알제리에서 지지받던 세력이 아니었다. 1956년 2월 조사에 따르면 FLN의 지지율은 10%밖에 안 됐지만 반대 여론은 20%가 넘었으며 알제리인의 80% 이상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론 과격화는 매우 손쉬운 입지 강화책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FLN은 프랑스가 알제리 통치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건 여성 참정권 확대 정책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투표인 등록을 한 여성들을 참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또 프랑스군과 FLN은 서로서로 변장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다음 "프랑스/FLN 놈들이 선량한 민간인을 학살했다!"며 언론플레이도 했다. 서로서로 대놓고도 하고 변장하고도 하면서 시민들만 죽어나갔다. 그 외에도 FLN은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들과 심각한 내분을 벌였다. 심지어 FLN이 다른 알제리 독립운동 단체를 습격하여 구성원들을 잔인하게 죽여 버린 사건도 있었다. 특히 MNA(Mouvement national algérien, 알제리 민족 운동)와 FLN 사이에서 진행된 카페 전쟁에서는 5천 명이 사망하였고 이는 알제리 전쟁이 단순히 프랑스 VS. 알제리 독립군의 구도로 해석될 수 없었던 알제리 내전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MNA 당원이란 이유로 30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당한 멜루자 학살 사건은 이런 폭력의 절정으로, 멜루자 출신 알제리 노동자 168명은 FLN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며 모두 아르키에 입대했다. 게다가 모든 무장 게릴라들이 그렇지만 이들은 시골을 장악하기 위해서 가공할 정도의 폭력을 사용했다. 산악과 농촌의 알제리인들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민족해방군'들이 총을 겨누고 민족해방을 위해 가진 재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 부딪혔고 머뭇거리면 구타는 기본이요 참살당하고 교살당하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자기 아이들도 먹을 것이 없는데 먹을 것 입을 것을 FLN에게 바쳐야 했다. 반면 프랑스는 알제리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유화책과 알제리의 경제개발 등 당근을 제시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숫자의 알제리인들은 자발적으로 프랑스 통치에 합류했다. 아르키들의 숫자가 수십만에 이르렀던 것도 FLN 통치 하에서 살기 어려워진 알제리 농민들의 자발적 입대나 그냥 프랑스인과 같이 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혀 약식 사형선고가 내려진 알제리인들이 살기 위해서 입대한 사례가 엄청난 비율을 차지한다.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만행을 크게 보도했다가는 자칫 알제리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할까봐 일단 숨겼기에 당시에는 사건의 정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제리가 독립한 후에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